고통의 의미(11/11/2012주일예배)

작성자
김동원목사
작성일
2012-11-14 02:14
조회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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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민과 어떤 고통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의미를 찾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2 고통의 이유를 찾으라.

●새디스트와 메조키스트
새디스트는 남에게 고통을 주면서 기쁨을 맛보는 사람들이고, 메조키스트는 고통을 당하면 기쁜 사람들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 고통의 매니아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산적한 고통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요9:1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9: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아멘.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눈먼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러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고쳐달라는 말도 없습니다. 그냥 그 사람의 상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자기는 어떻게 피해보려는, 아주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이런 크리스찬이 되지 마십시오.
지나가는 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향해서 무엇인가를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
저 사람은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나? 를 생각하는 것은 크리스찬의 바른 모습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분석한 고통의 원인입니다.

1) 나 때문에 당하는 고통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고통으로 가르치십니다. 사람은 기뻐서 배우는 것보다, 고통으로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고통을 당하면 제일 먼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 줄 아시나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가장 대표적인 고통의 원인은 나자신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내가 죄를 지어서 당하는 고통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하십니다.

●잘 나갈 때.
사람이 잘 될 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냥 다 내가 잘해서 이렇게 잘 되는 것이라는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을 경우, 슬픈 일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라고, 겸손하게 되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종종 삶에 고통을 주십니다.

●나때문에 고통당할 때,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나 자신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드시는 사랑의 매입니다. 그 매를 보지 마세요. 그 사랑을 보세요. 그리고 나 자신을 바꾸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남 때문에 당하는 고통

●때로는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잘못해서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내 죄가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일이 있지 않도록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은 남을 돌봐야 합니다. 남의 죄로 내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노숙인 봉사를 나가는 이유
저희 교회는 무척 특이합니다. 노숙인 봉사를 다락방이 돌아가면서 나갑니다. 돌아가면서 나갈 때는 다락방공부도 없습니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몸으로 하는 봉사이기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봉사입니다.
한번 온 사람들이 평균 3번 이상씩을 와서 먹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은 최소한 3끼를 굶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끼를 굶을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게 궁지에 몰린 사람이 그냥 죽을까요?
아니면, 세상 한번 뒤집고 죽을까요? 세상 한번 뒤집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가다가 갑자기 총이 날아오고, 칼이 날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의 죄때문에 내가 다치거나 죽을 수가 있고, 내 가족이 그런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내 죄만 잘 관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남의 죄 때문에 내가 고통당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사회에 관심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만 잘해서 행복하게 살 수 없기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인만 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도 관심갖고 살았습니다. 끝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
그 죄때문에 내가 고생하지 않도록, 그 사람의 죄 짓지 않도록,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통

●그런데 사람들은 한가지를 몰랐습니다.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 죄, 아니면 남의 죄. 그래서 벌받아서 병이 생긴 것이겠지, 태어나면서 소경된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겠는가?

●우리 생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세요.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아멘.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벌로, 이런 장애가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죄를 벌로 연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이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닉부이치치
손발이 모두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죄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요? 부모님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이런 아이를 낳았나?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네 아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았냐? 이 아이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8살에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셨구나!
- 고통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2012 뉴욕 밀알집회에서 2백명이 새신자로 등록을 했습니다. 저보다 훨씬 나아요. 저 2백명 전도 못해봤어요. 제 평생할 사람을 이 사람은 한번에 했어요.

●예수님께서 이 소경을 고치십니다.
사람들이 죄의 원인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시고, 그 병을 고치셨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장은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안다고 하면 교만입니다. 이 셋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How는 압니다. 괴로울 땐, 주님의 얼굴보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도 3번째였습니다.
시험에서 이겨서,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어쩌면 여러분이 지금 이런 고통을 당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대표선수로 뽑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탄과 씨름하는 지도 모릅니다.
괴로울수록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시험을 이기는 방법 How 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시험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2 고통의 의미를 찾으라.

●유명한 심리학자이며, 정신과의사인 빅터 프랭클박사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자기가 의과대학시절 자기를 가르친 은퇴한 노교수님이 자기를 찾아오셨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이 늙으셨습니다. 그래서 빅터박사가 물어봤습니다.
“교수님... 무슨 문제가 있으신가요?”
노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빅터... 얼마 전 내 아내가 죽었어... 내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내가 더 이상 살아서 무엇하겠나? 너무 괴로워서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다네...”
평소에 너무 금슬 좋게 살던 부부였기때문에 충분히 그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도 정신과 의사선생님이에요. 다 알아요. 다른 사람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 자기가 병에 걸린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이분을 위로하시겠습니까?
빅터박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만일 교수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사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지금의 고통을 과연 누가 견뎌야 했을까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노교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곧 말했습니다.
"차라리 내가 당하는 게 낫지... 그래, 그 사람은 나보다 못 견뎠을 거야."
그 말을 하고, 노교수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들어올 때보다 훨씬 힘있게 악수를 하고, 사무실을 떠났습니다.

●뭐가 노교수님에게 힘을 주었습니까?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잖아요? 죽은 아내가 살아난 것도 아닙니다. 그냥 말 한마디에 힘을 얻고 돌아갔습니다.
이 교수님은? 고통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면 이미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고통의 의미를 찾고 나면,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훈련이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고통이 훈련이 됩니다.

●빅터 플랭클박사님의 생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로 생활하던 때, 2차대전이 일어났고, 1942년 독일군에 의해서 끌려간 곳은 죽음의 아우슈비츠수용소였습니다. 그 속에서도 자기 연구를 계속하며, 글을 썼는데, 그걸 독일군들이 발견했고, 모두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학자에게는 죽음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죽을 까?
그 때 독일군이 자기가 입을 죄수복을 줬습니다. 누군가 입다가 죽어서, 자기에게 준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의 주머니에 쪽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 전에 그 옷의 주인, 지금은 죽은 이전 주인의 쪽지였습니다. 잃어 보았습니다. 성경말씀이었습니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아멘.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살자.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내가 교수를 하든, 의사를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다.
고통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분에게 그날부터 아우슈비츠는 수용소가 아니고, 훈련소가 되었습니다.
이분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의미치료”라는 방법을 개발하셨습니다. 고통이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의미를 못 찾으면 그 사람은 죽는다는... 자기의 경험을 정신과치료에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욥이 고통의 의미를 찾습니다.
23장까지 지나왔습니다. 자기 재산을 모두 날리고, 자기 자식 10명이 같은 날 다 죽어버리고, 자기의 몸은 피부병때문에 기와로 긁어서 피가 났고, 사람들도 못 알아보는 그런 상태에... 그가 드디어 이 고통의 의미를 찾습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아멘.

●이게 고통이 아니라, 훈련이라고 깨닫습니다.
이 고통이 자기 망하게 하고 죽게 하는 고통이 아니라, 자기를 “순금”같이 만드시는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힘을 내기 시작합니다.

●고통의 의미를 찾습니다.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면 이미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내 계획대로 되는 줄 알고, 형통했는데, 자기의 계획이 너무나 망가져서, 도무지 어떻게 살고 있는 지 무슨 길을 걸어가는지? 이렇게 살다가 내가 무엇이 될지, 내 가정이 어떻게 될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단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나를 정금과 같이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신앙의 고백을 한 후, 그는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걸 고통으로 두지 마세요. 훈련으로 바꾸세요. 의미를 찾으시면 됩니다. 빅터박사 찾았던 것처럼. 어떻게든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어느 젊은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서로를 너무 너무 살아하고 아끼며 살았던 부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아내가 말기 암진단을 받습니다. 남편은 회사도 그만두고 아내를 간병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끔찍히 아내를 돌봤습니다. 자기 뒷바라지 하다가 몹쓸 병에 걸린 아내에게 속죄라도 하듯이, 최선을 다해서 아내를 돌봤습니다. 아내는 하루 하루 상태가 나빠졌고, 이제 마지막 유언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내가 무엇이라고 유언을 했을까요?
아내가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만 사랑하고 산 줄 알지요? 아닙니다. 나는 당신 말고도 2명의 남자를 더 사랑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나 죽어도 내 생각하지 말아요. ”
남편은 기가막혀서 아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나말고 두 남자는 누구요?”
“내 평생 3명의 남자를 사랑했습니다.
첫째는 옆집 오빠...
둘째는 대학 선배...
셋째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몇시간 뒤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 남편의 마음은 너무 무거웠습니다. 도대체 나 말고 2명의 남자는 누구일까?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한사람씩 이름을 쓰고 지워서, 그 사람들을 찾기로 했습니다.
옆집에 살던 오빠들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친하게 지낸 대학선배들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한사람씩 지웠습니다. 몇명을 지우다가... 쥐고 있던 볼펜을 땅에 떨어 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습니다. 그 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아내의 옆집에 살았던 오빠이고, 자기가 아내의 대학 선배였습니다.
아내는 자기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남편이 자기가 죽고 난 뒤, 다른 여자를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의 괴로움에 의미가 생겼습니다. 더이상 괴로움이 괴로움이 아니었습니다.
여보... 당신 때문에라도... 더 열심히 살께...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면 이미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욥이 고통의 의미를 찾은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 삶의 고통에서 의미를 찾으세요. 그 고통이 여러분 삶의 훈련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